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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7 10:38 테스트 업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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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탐 당도선별 12brix 감귤, 2kg(로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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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단의 사진 같은 귤은 매우 잘 익은 것이고, 실제로 딸 때는 초록색이 군데군데 박힌 게 수두룩하다. 유통기간을 늘리기 위해 약간 미리 따는 경우 일수도 있지만 아예 시퍼런 건 작정하고 기준 품질 이하 (당도 8브릭스 미만) 일 때 조기수확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전문 농사꾼이 아니라면 잎이 짙은 녹색이다보니 착시를 일으켜 잘 익은 과실만 수확한다고 해도 따고 보니 덜 익었거나[3] 잘 익혀도 부분적으로 색이 덜 나거나 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이처럼 설익은 귤은 당도가 떨어져서 신맛만 나므로 사람들이 당연히 싫어한다.
이처럼 초록색 귤을 기피하다 생겨난 속임수가 착색 가스. 귤을 따자마자 착색을 돕는 에틸렌 가스[4]를 강제로 뿌려서 전부 귤의 주황색을 만들어버리는 문제가 있다. 적당한 당도임에도 상품 가치를 올리기 위해 착색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당도 미달하는 조기수확 감귤이 가스를 쐬고 불법적으로 유통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추석 등 감귤이 나오기 이른 시기에 팔리는 노란색 감귤이 엄청나게 신 폭탄일 때가 종종 발생하며, 본격적인 귤 유통시기에도 신맛이 터지는 건 착색 가스를 뿌린 미숙 귤로 보면 된다. 다만 2010년대 이후부터 이러한 문제가 제기가 되고 웰빙 열풍이 불면서 오히려 엄청 잘 익은 귤들이 강제착색한 귤로 오해받고 있는 경우도 많아졌지만 실제론 강제착색한 귤들은 제주도 등 주요 산지에서 법적으로 금지된 상태다.
강제 착색한 귤은 맛도 시지만 금방 무르고 썩어 버린다. 강제 착색한 귤을 쉽게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색이 전체적으로 연하고 꼭지가 바싹 말라 갈색으로 변해있으면 강제 착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오래 저장한 감귤 역시 꼭지가 말라 갈색으로 변하므로 꼭지 상태만 봐도 신선도를 가늠할 수 있다. 추석 직전 등 조생감귤의 수확철이 아닌데 노랗게 익은 감귤이라면 구매를 피하고 맛이 덜하더라도 초록빛을 띄는 감귤이 정상이다.
KBS 소비자 고발(現 KBS 똑똑한 소비자 리포트)에서 방영한 이후로 초록색 귤이 좀 보이다가, 다시 귤색 귤만 있다. 물론 수확기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수확기 초기에는 일부분이 익지 않은 귤이 많지만 늦게 수확하거나 오래 보관하면 익어서 노랗게 변한다. 아무래도 늦게 딸수록 색이 잘 나는 편이다. 품종에 따라 수확시기가 다르다. 하우스, 극조생, 조생, 만생 순으로 수확이 이루어지는데 가격은 하우스감귤이 가장 비싸고 극조생 감귤이 가장 싸다. 제철이 아닌 여름에 귤을 재배하는 하우스감귤은 신맛에 비해 단맛이 탁월하고 그 수확량도 적어 겨울철 감귤보다 평균 3~5배가량 비싸고, 극조생감귤은 하우스감귤 출하 시기가 끝나고 조생감귤의 전에 나오는데 초록빛을 띠며 단맛에 비해 신맛이 강한 감귤이 많다. 공판장에서는 극조생 귤이 5킬로에 2~3천 남짓으로 거래되는 일이 허다하다.
10월~이듬해 1월까지가 제철[5]로, 한 마디로 겨울을 지배하는 과일. 겨울이 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샌가 귤박스가 집 베란다나 냉장고에 자리잡았고 자신의 손은 귤껍질을 까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한 번 귤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면 TV를 볼 때도, 시험 공부를 할 때에도, 인터넷을 할 때에도 귤을 먹는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라 겨울이 되면 코타츠에 앉아 귤을 까먹는다는 클리셰가 있을 정도.
잘 숙성하여 수확하는 방법도 있으나 배송과정에서 당연히 상하게 되며 따기도 전에 상해버리는 양도 많고 수확한 귤도 금방 썩어 보관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가격 면에서도 그다지 이득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부분은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손해이므로 지속적인 홍보와 개선이 필요하다.
보통 시장에서 보이는 귤은 씨앗이 없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귤에서 씨가 나오는 것보다 길에서 동전 줍는 게 쉬울 정도로 잘 안 보이고 나와도 귤 하나에 씨앗 1~2개밖에 안 보인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먹는 귤이 오랫동안 씨앗이 없는 쪽으로 개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귤마다 씨앗이 박힌 종도 있고[6], 씨앗이 없는 귤은 대부분 탱자나무에 접목되어 번식한다. 때문에 귤에서 나온 씨앗을 심어도 그 나무에서는 귤을 딸 수 없다. 씨앗은 식감도 맛도 별로라고 한다.
박스 단위로 쟁여놓고 상해서 버리는 경우가 하도 많은 과일이다 보니[7][8] [9]그냥 먹어서 처리하기 힘들다면 갈거나 짜서 주스를 만들어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뜻밖에 냉동했다가 실온에 몇시간 해동해서 먹어도 전혀 맛의 변화가 없으니 장기보관이라면 차라리 냉동보관 하는게 좋다. 속껍질이 씹히는 느낌이 많이 들지만 먹을 만하며, 체에 한 번 걸러서 속껍질을 빼고 마셔도 좋다. 또 냉동실에 살짝 얼리면 슬러시 같은 느낌이 나서 좋다. 수분이 많긴 하지만 잼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귤향이 강하게 나기 때문에 귤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강력 추천. 귤로 청이나 마멀레이드를 만들어 장기보관할 수도 있다.
귤이 썩기 시작하면 겉껍질의 어느 한 부분이 물러지기 시작한다. 귤의 부패가 더 진행되면 그 부분이 하얗게 변한다. 이렇게 된 귤은 먹으면 해롭다. 귤껍질에 보이는 곰팡이는 극히 일부고 이미 귤 전체에 곰팡이가 침투해있기 때문이다.[10] 곰팡이 핀 귤이 담긴 용기도 귤과 용기를 분리한 다음 철저히 소독해야 한다.
껍질을 떼어내서 먹는 과일들 중에선 과육과 껍질의 분리가 매우 단순한 것 중 하나다. 귤 외에 이런 과일들로는 바나나와 포도, 방울토마토 등이 있다.
우유와는 (미각적인 의미에서) 궁합이 그다지인 음식. 요거트와는 궁합이 그럭저럭인데 귤의 신맛을 상쇄하는 용도로 우유를 먹으면 몰라도, 둘을 동시에 갈아먹거나 귤맛 우유 같은 것으로 먹는 것은 비추되는 조합이다.[11] 근데 빙그레는 하필 그 조합을 선택했다[12] 역으로 새콤달콤한 맛 덕에 사이다나 스프라이트 등의 탄산음료와는 제법 궁합이 좋다.
디저트 계열의 음식을 데코레이션할 때 종종 쓰이는 과일 중 하나다. 복잡하게 세공할 필요 없이 껍질만 까서 알맹이만 떼거나, 가로로 가른 다음 껍질만 떼도 충분히 예쁜 모양이 나오는 과일이어서 많이 사용된다. 혹은 통조림을 쓰기도 한다.
탕수육 만들 때도 소스에 썰어 넣는 가정이나 중국집들이 꽤 있다. 물론 사과, 오렌지, 바나나, 딸기, 파인애플, 한라봉 등 다른 과일들도 넣는 곳도 많다.
조류독감이 유행하는 시기 닭고기를 군대로 대량 납품하듯이 과거 군대에서 귤이 안 팔리면 귤을 병사들에게 짬 때렸다.[13]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안영은 귤이 회하(淮河)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는데 이를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남귤북지(南橘北枳)'.[16][17] 또 삼국지의 등장인물 육적은 모친을 위해 원술의 귤을 빼돌린 회귤유친의 일화가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귤을 삼국시대 이전부터 재배해왔으나 한반도 본토에서 기르기 힘들어, 제주도 정도를 제외하면 왕족이나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탐라지에 따르면 백제 문주왕 2년(476) 탐라국에서 지역 특산물로 귤을 바쳤다고 하며, 고려사에 고려 문종 6년(1052)에 탐라국에서 세금으로 받아오던 귤의 양을 늘린다는 부분이 있어 이때부터 귤을 진상했음을 알 수 있다.[18]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태조 원년(1392)부터 공물 기록이 계속 나온다. 세종 8년(1426)에는 호조의 게시로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에 유자와 감자를 각 관서에 심게 했다고 한다. 세조실록 2권에는 '감귤은 종묘에 제사지내고 빈객을 접대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는 기록도 있어 당시 귤이 그만큼 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귤을 왕실 전용 온실에서도 길렀다는데 세종대왕이 총애하는 후궁한테 직접 귤을 준 이야기, 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귤을 내렸는데 학사들이 귤보다는 접시에 문종이 친필로 쓴 시를 더 탐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매년 '황감제(黃柑製)'라 하여 성균관 유생들에게 감귤을 하사하고 치른 시험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 책을 빌려줬다고 고맙다는 편지와 같이 귤 3개를 같이 보내준 양반이 있었는데 그 귤을 받은 양반이 "이렇게 귀한 것을!" 놀라서 무척 고마워했다는 일화가 기록에 남아있을 정도로 귤은 비싸고 쉽게 구해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도 비슷해서 한때 귤은 쌀보다 비쌌다. 후술하듯이 그 무렵에 제주도 사람들은 귤 나무 한 그루 잘 키우면 애를 대학까지 공부 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귤나무를 대학나무라고 하였다.[19] 그래서 4.19 혁명 당시 이기붕의 부정축재를 깔 때 그의 집에서 귤 한 박스가 나온 것이 언급되기도 했다.[20] 2023년 12월 11일 두시의 데이트에서 한 청취자가 오렌지를 고등학교 때 처음 먹어봤다고 얘기하자, 이에 당시 일일DJ였던 배철수도 그때의 귤은 부잣집만 먹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에는 워낙 과잉생산 되는데다 경제발전으로 사람들의 소득수준이 올라갔고 남부지방까지 재배가능지역이 넓어지기까지 해서 제철이 되면 장바구니에 담기 가장 만만한 싸디 싼 과일로 등극. 다국적 기업의 힘으로 재배, 가공되어 들어오는 오렌지 주스보다 국내산 가공품인 제주감귤 주스가 가격이 1/3 정도 쌀 정도니까 말 다했다.
조선시대의 제주도산 귤 품종과 현대 제주귤 품종은 다르다.[21] 당시 제주도 및 남해안에서 기르는 귤을 진상품으로 바쳐야 했는데, 정약용의 기록에서 여름에 귤이 녹색으로 작게 열리면 나무둥치에 몇 개인지 표시해 놨다가 귤이 익으면 그 양만큼 바쳐야 해서, 바람에 떨어지거나 하면 다른 곳에서 사서 바쳐야 하는 등 그 부담이 컸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관리들의 수탈도 있어서 결국 이에 시달리다 못한 농민들은 일부러 귤나무를 죽이기도 했다.[22]
제주도민들이 좋은 토종귤 품종을 다 죽이다보니 토종귤의 품질이 낮아졌고, 개량종에게 자연스럽게 밀려난 뒤에는 현대에도 제주 전통귤은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보기 힘들지만 한방에서는 약귤이라고 토종귤을 쓰기도 한다. 제주 재래귤 품종 가운데 하나인 동정귤(洞庭橘)은 멸종했다고 알려졌었으나 애월읍 광령리에서 수령이 200년이 넘는 나무가 한 그루 발견되었다. 그나마도 제주 4.3 사건 때 불나서 고사할 뻔했다고.
또다른 제주도의 토종귤로는 청귤이 있는데 고려시대부터 자생해온 재래종으로 추정한다. 현대에는 시중에 나오지 않고 감귤연구소나 감귤박물관[23]에서 보존용으로 10그루 내외만 자생한다.
한국에서 자주 먹는 귤 품종은 온주밀감[24]이며 일본의 규슈로 건너가 씨가 없는 감귤로 개량된 품종으로 재일교포들이 친척에게 보내준 묘목에서 조금씩 생산하기 시작해 제주를 대표하는 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산 귤이 유통되었으나 그 이후 일본산 귤이 수입되지 못한 영향이 컸다.
사실 제주도에 온주밀감을 도입한 사람은 20세기 초 프랑스 출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에밀 타케(Emile Taquet, 1873~1952) 신부다.[25] 1911년 타케 신부는 일본 아오모리에서 선교하는 위르뱅 포리 신부에게 왕벚나무 묘목을 보낸 답례로 온주밀감 묘목 14그루를 받아 서귀포시 서홍동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면형의 집'에 심었다.[26] 제주에서는 에밀 타케 신부가 심은 때를 기해 제주 감귤 100주년 행사를 기획한 적도 있었지만 윗사람이 바뀌고, 토종귤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무산되었다.
한편 타케 신부의 온주밀감이 잘 크는 것을 본 일본인 미네(峯)가 1913년 온주밀감 2년생 묘목을 도입, 나중에 제주농원이 된 서귀읍 서홍리에 심어 대량 상업화를 시도한다.[27] 또한 일본인 미네는 조선인 박영효와 함께 온주밀감뿐 아니라 워싱톤 네블,[28] 하밀감(夏蜜柑) 등을 1910년경 전파하면서 1920년부터 매년 귤나무 7천~8천 본이 일본에서 제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감귤 묘목이 제주에 도입되었지만 농가에서 재배가 활성화되지는 않았고 정원수로 몇 그루 정도 심어진 것에 그쳤다고 한다. 이에 일본인 중심의 농민회가 감귤 묘목을 나눠주며 생산량을 늘리려 했지만 이미 일본에서 생산된 감귤이 자유롭게 들어왔기 때문에 제주감귤이 비싼 값을 받을 수 없어 판매 판로가 뚫리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 광복 이후 우장춘 박사가 감귤의 품종 개량을 시도하였지만 6.25 전쟁으로 혼란한 와중에 무산되었고, 제주에서는 1948년 제주 4.3 사건이 터지면서 농민들이 생활터전을 잃어 감귤재배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고 1955년에야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감귤묘목이 도입되었다.
제주도의 감귤재배가 확산되는 계기는 1964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순시에서 제주도의 감귤을 중점적으로 키우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이듬해 1965년부터 감귤심기 붐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 농림성으로부터 감귤 묘목을 수입해 농가에 보급하였다. 과거 귤나무는 키가 커서 사다리를 타고 귤을 수확해야 했는데, 현대의 관목처럼 키가 작은 귤나무는 바로 이때 일본에서 도입된 것이다.
1975년 제주도 감귤재배면적이 1만 ha에 달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2만 5000여 ha에 감귤 생산량은 60만 톤에 이르렀다.[29] 이후 생산량은 60만 톤 내외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일본에서 '스다치'라는 품종이 제주도로 들어왔는데 제주도의 옛 이름 영주를 따서 영귤이라고 불렀다. 영귤은 크기는 탁구공만 하고 겉껍질이 초록색이라서 청귤, 풋귤과 헷갈릴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른 감귤 품종이다.
1998년부터 UPOV가 발효되어 지적재산권이 강화된 바람에 일본으로부터의 신품종 도입이 어려워지며 로열티를 물어야 하기에 독자적 품종개량이 중요해지고 있다. 또한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수입 오렌지와의 경쟁도 불가피해졌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북한에 감귤보내기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2010년 북한이 천안함 피격 사건을 일으킨 이후로 중단되었다.
2012년 한미 FTA가 발효되면서 미국산 만다린의 관세율이 2012년 144%에서 점점 낮아져 2021년 기준 48%까지 내려갔고 2026년 완전 철폐 예정이라 제주도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해졌다.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 때 북한이 선물로 보내줬던 송이버섯 2톤의 답례로 청와대에서 귤 200톤을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보냈다. #
참고로, 북한에서 귤은 기후 때문에 재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중국에서 귤을 수입해 먹는데, 중국산 귤은 북한 기준으로 가격대가 비싸기 때문에 아무나 못먹고,[30] 평생 못 먹어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선물용으로 애용된다, 이게 남으면 측근들에게 선물 형식으로 하사한다.
품목 또는 명칭 | 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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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 단위별 내용물의 용량 (중량), 수량, 크기 | 2Kg |
생산자 및 소재지 | 전라도 |
원산지 | 국산 |
제조연월일 | 20250218 |
유통기한 / 소비기한 | 20250718 |
세부 품목군별 표시사항 | 과일 |
식품 등의 표시, 광고에 관한 법률에 따른 소비자안전을 위한 주의사항 | 주의사항 |
소비자 상담 관련 전화번호 | 010-1111-2222 |